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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복식문화사

바로크 시대의 복식

by 해피버튼 2023. 3. 14.

17세기 전반부는 르네상스 스타일과 네덜란드의 시민복장이 교체된 시기이며 바로크풍의 취향은 루이 14세가 왕으로 즉위한 중엽부터 성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체된 패션의 성격은 착용자가 속한 신분과 나라에 따라 다양하여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가장 성행한 바로크 양식으로 이 시대를 특징짓고 있다.

화려한 직물의 산지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궁정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복식은 이 시기에 와서는 프랑스와 영국으로 패션의 중심지를 옮겨가게 되었다. 역시 패션의 중심은 그 당시의 국력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3세와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 그의 아내인 안네 왕비, 그리고 루이 14세가 그 당시의 패션 리더로서 17세기의 의상을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복식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반다이크 및 할스, 렘브란트, 루벤스 등 그 당시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 또는 그 외 예술가들의 작품인 조각, 동전, 메달, 또는 현존하는 당시의 의상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는 각종 화려한 직물을 생산했는데 의상이 너무 화려해지자 국고의 손실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복식금지령을 만들어 레이스 수입그지와 보석의 사용을 억제했다. 레이스와 보석 대신 루프 장식이 유행하다가 프랑스에서 레이스 직조기가 발명된 이후 다시 레이스 장식이 크게 유행했다. 바로크 의상의 특징인 루프와 레이스 장식 남용은 남성의 복장에서는 경박한 느낌을 주었으나 여성의 복장에서는 과대장식이 오히려 화려하고 여성스러움을 주어 의상을 돋보이게 했다. 르네상스가 보석장식의 시대였다면 바로크는 루프와 태슬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크 취향은 확실히 여자의 복식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했으나 실상 남자복식에 더 많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남성들의 옷차림은 마치 여성복을 입은 것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영국의 의상은 크롬웰 시대를 맞아 수수한 양상을 띠었으나 왕정복고 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다시 화려해졌다. 스페인은 초기에는 독자적인 형태를 유지하다가 후기에 프랑스의 영향으로 보석장식은 사라지고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루프와 태슬, 버튼 등이 장식으로 나타났다.

 

여자의 의복

 

17새가애 들어와 사회적으로 활동적인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가정에서 집안일과 약간의 독서로 만족해하면서 의상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17세기 초에 남자들은 비활동적인 의상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활동에 편리한 의상을 택했으나 여자들은 1620년대 중엽까지 활동에 불편한 귀족풍의 스페인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것은 스페인 문화가 아직 기울지 않았었고 루이 13세가 스페인의 필립 3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종전대로 활동의 부자유함을 참아내며 호화로운 직물과 자수로 치장한 의상을 지상의 미로 간주하였다.

여장이 남장처럼 입기 편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625년경으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의 경제정책에 의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사치한 직물수입을 금지하는 사치금지령이 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들은 이제까지의 호화스럽던 사치를 단념하고 대신 안락한 의상 속에서 신체의 해방감을 즐겼다.

루이 14세기 즉위하기 전, 루이 13세가 통치하던 17세기 전반부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스커트 속에서 힙을 크게 부풀리던 버팀대가 축소된 것이다. 버팀대는 부피와 함께 길이도 짧아져 16세기보다 기능적인 형태로 변했다. 소매의 부풀림도 줄어들고 상체도 딱딱한 패드나 바스크를 넣어 형태를 만들거나 금속제 코르셋으로 조이던 것이 활동하기 조금 편하도록 뾰족한 스터머커가 약간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변했다. 실루엣뿐만 아니라 색과 장식에도 영향을 주어 화려한 색상보다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과대 장식보다는 간소한 장식의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자유스러운 형태로 바뀌게 된 결과에는 네덜란드의 영향이 컸는데, 당시 프랑스 궁정의 세력은 약해진 반면에 네덜란드가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느 나라보다 부유하고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영향에 의한 간소한 복식은 17세기 전반부의 유행으로 끝나고, 루이 14세 즉위 이후 다시 허리를 조이고 스커트를 크게 부풀리는 거창한 실루엣이 등장하여 요란한 취향이 그전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남자의 의복

 

16세기의 남자복식은 패드, 퍼프, 슬래쉬를 사용한 복잡한 구성과 과장으로 부픽 큰 실루엣을 이루었다. 이렇게 기교적인 차림은 그 당시 범할 수 없는 남성들의 위엄과 귀족풍의 분위기를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16세기를 지배했던 이러한 사고방식은 17세기로 들어오면서 네덜란드의 시민문화의 영향으로 실생활에 맞는 기능적인 의상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리슐리외가 행했던 경제 정책에 의한 사치금지령과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실용적이고 간편한 의상이 요구되고 있을 때, 그 당시 호황을 누렸던 네덜란드의 실용적인 의상이 좋은 본보기로 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처음 10년 간은 16세기 말의 르네상스 스타일이 약간 변호되어 몸에 편안하게 맞는 형태로 서서히 옮겨지다가, 1620년 이후에는 상당히 여유 있고 편안한 의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패드가 없어져서 피스카드 벨리도 사라지고 약간의 슬래쉬와 퍼프만 남게 됨으로써, 보다 실용적인 의상으로 정리되어 갔다. 

1630년경에는 네덜란드의 시민복이 각지로 보급되었는데 각국마다 자기 나라의 독특한 의상과 함께 이것을 잘 소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 스타일의 전면적인 지배는 유럽에 있어서의 시민복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복식사상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이처럼 간편해진 푸르푸앵과 넉넉한 반바지는 17세기 전반부를 대표한다.

그 후 1650년경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즉위하자 다시 왕정이 강화되어 귀족풍의 복장이 궁정을 지배하면서 독특한 바로크 양식이 유행한다. 그러나 귀족풍의 복장은 이미 뿌리가 내린 시민복을 밀어내지는 못하고 함께 융합되어 성행했다. 이때 생긴 새로운 남성의 귀족적 시민복인 쥐스토코르는 바로크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반바지 퀼로트와 함께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후반을 대표하는 복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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