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복식
1. 혁명 시대(1789~1795년)
17세기 후반부에 영국에서 도입했던 르댕고트가 프랑스의 로브와 합해지면서 18세기 전반부의 거창한 로브보다 간단해지고 훨씬 기능성을 띤 형태로 유행하던 중 1789년 혁명기를 맞는다. 허리를 가늘게 조이고 스커트는 자연스럽게 부풀렸던 18세기 후반의 우아하고 화려한 로코코풍의 복식은 귀족문화의 마지막을 고하면서 혁명의 혼란기에도 한동안 그대로 유행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부터 고대 그리스의 의상을 동경하는 풍조가 높아짐에 따라 새로운 취향의 복식이 나타났다. 즉,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그리스의 키톤과 같은 스타일의 의상이 등장한 것이다. 옛 것을 바탕으로 한 이 새로운 드레스는 슈미즈가운으로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긴 스커트, 하이 에이스트라인, 그리고 짧은 소매 등의 간편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하이웨이스트라인에 파니에를 받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매의 미적 효과를 주면서 입고 활동하는데 편해 기능적인 효과도 함께 발휘했다.
2. 총재정부 시대(1795~1799년)
프랑스에서 슈미즈 가운이 일반화 된 것은 18세기말인 총재정부 시대에 이르러서다. 복식상의 혁신에 있어 여자의 경우 남자의 복식처럼 정치성을 띠지 못하므로 시대적 사조의 반영도 남자복보다 훨씬 늦어진 것이다.
역사상 최고로 높이 올라갔던 로코코의 여자 머리장식과 모자도 허물어져 가는 귀족풍을 그대로 지탱하려는 듯 한동안 그대로 유행했다. 컬한 머리를 화려하고 높게, 또는 간단하고 낮게 올려 쌓는 스타일 외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스타일도 함께 유행했다. 머리형이 단순화됨에 따라 모자에 관심이 많아져 다채로운 장식을 붙인 보닛이 유행했다. 애국형 또는 시민형이라는 명칭 아래 실용적인 보닛이 쓰였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자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캡형 또는 큰 리본으로 장식한 밀짚모자 등도 애용되었다.
신발은 의상보다 먼저 간소화되어 높고 화려한 구두의 굽은 당시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상에 어울리지 않아 없어지고 이를 대신하여 낮은 굽의 펌프스가 유행했다. 궁정인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던 빨간 굽은 혁명에 의해 복식상의 계급차가 소멸함과 함께 그 상징성을 상실했다.
총재정부 시대가 되면서 영국에서 직접 프랑스로 도입된 고대풍의 슈미즈 가운이 먼저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했다. 파리의 부인들은 그리스풍이라는 구실 아래 코르셋과 파니에는 물론 속옷도 입지 않고 맨살 윙에 슈미즈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얇은 옷감을 통해 다리의 곡선이 보이기도 했다. 이 가운은 상체와 소매 부분에 얇은 카튼으로 안을 받치고 스커트 부분은 안감을 대지 않았다. 슈미즈 가운은 짧은 소매가 달렸기 때문에 팔꿈치까지 오는 긴 장갑을 끼는 것이 유행했다. 총재정부 시대 초기에는 스커트의 뒷길이가 앞보다 약간 길어서 마루에 살짝 끌리면서 한 손으로 무릎이 보일 정도로 끌어올리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
3. 집정 시대와 제1 제정 시대(1799~1815년)
총재 정부 시대를 지나 집정에서 제1 제정에 걸친 부르주아의 화려한 생활양식은 의상에도 반영되었다. 1796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한 후 1804년에 프랑스 황비가 된 죠세핀은 이 당시의 패션 리더로 손꼽힌다. 그녀를 중심으로 창조되는 모드는 극히 단순한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면서 옷감의 우아함, 현란함, 다채로운 자수 장식 등에 의해 부르주아의 취향이 사치스럽게 나타났다. 직선형의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는 엠파이어 스타일은 제 1제정 시대에 가장 널리 유행했기 때문에 엠파이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인데 실제로는 이미 집정 시대에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집정 시대의 복식은 총재정부 시대의 것을 그대로 계승했는데 부자연스러운 것이나 인공적인 것은 정리되고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통일되었다.
제1 제정 시대의 복식은 집정 시대의 것보다 한층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 우아함을 더했다.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프랑스인 특유의 전아한 취향이 복식문화에 되살아났다. 고대풍의 직선적 실루엣은 점점 단이 넓어지면서 궁정취향으로 옮겨갔고 짧은 퍼프소매 외에 영국의 영향을 받아 긴소매도 많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이후로 슈미즈 가운은 뒤에 끌리는 장식적인 트레인과 데콜테를 따라 달린 주름 칼라인 콜레트와 넓어지는 스커트 폭 등 단순한 슈미즈 가운을 로브로 변형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1808년경부터 나폴레옹 제정의 전성기를 맞이해 1811년경까지 생활양식은 호화로움이 더해갔다. 나폴레옹의 제2왕비 마리 루이즈는 죠세핀의 뒤를 이은 패션리더로 금, 은실로 전면에 화려한 수를 놓은 의상을 입는 등 모두 호화로웠다.
남자의 복식
프랑스혁명은 남자의 복식에 있어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귀족적 복식은 궁정에서만 모습을 달리해 남아 있고 일반사회에서는 시민적이고 실용적인 복장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궁정에서는 종전의 옷차림으로 부드러운 실크로 만든 목장식 자보를 보이며 칼라를 높이 세운 상의 프락 아비에와 짧은 조끼로써 베스트, 꼭 끼는 바지 퀼로트의 완전한 성장 차림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에 비해 민중을 배경으로 하는 자코뱅당은 실질적이고 간소한 복식을 즐겨 착용했다. 옷감과 색상이 수수하여 귀족들의 옷차림과 쉽게 구별이 되기도 했지만 특징적인 것은 짧고 꼭 끼는 퀼로트가 길고 헐렁한 판탈롱으로 바뀐 것이다. 판탈롱은 영국에서는 팬털룬즈라고 하며 자루 모양으로 헐렁한 칠부길이의 바지로 17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미 선을 보였으나 유행하지 않다가 프랑스 혁명군들이 귀족복인 퀼로트에 대항하는 의미와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착용하기 시작했다.
혁명기가 지나고 총재정부 시대가 되면서 혁명파의 실용적인 복장과 왕정주의파인 뮈스카댕의 복장이 정치성을 띠며 대립했다. 즉,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의 정치적 대립은 두 가지 형의 복장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자코뱅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혁명적인 의상으로 카르마뇰에다 판탈롱을 계속 착용함으로 시민복을 보급하고자 했으나 지롱드당을 지지하는 젊은 층의 앵크르와야블파는 이러한 자코뱅파의 간소한 차림을 조소하며 귀족풍의 괴상한 차림을 했는데, 이들의 복장 자체를 앵크르와야블이라 한다. 즉, 불균형하게 크고 넓은 칼라를 젖혀 놓은 상의에 턱밑까지 높게 크라바트를 여러 번 감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퀼로트 바지에 끝이 뾰족한 슈즈나 부츠를 신었으며 양쪽으로 각이 진 모자나 원추형의 특이한 모자를 쓰고 때로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옛 귀족들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등 기묘한 옷차림을 보였다. 이와 같이 종래의 귀족풍과 새로운 시민풍이 병행하면서 프랑스의 제1제정 말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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