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문화적 배경
크리트 복식문화는 비단 크리트섬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와 소아시아 지방, 그리고 그리스 본토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했다. 에게라는 바다를 통해 이들을 연결시킨 교량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 두 세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크리트 복식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리트 문명과 에게 문명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고학자들에게 있어 에게는 단순한 지리학적 용어만은 아니다. 그들은 에게를, 그리스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인 기원전 약 3000년 경에서 기원전 약 1100년까지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문명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에게에는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문명이 있다. 즉, 전설적인 크리트의 왕 미노스의 이름을 본떠서 미노아문명이라 불리는 크리트 문명, 크리트 북방에 있는 소군도의 문명인 시클라데스문명, 그리고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를 중심으로 한 미케네 문명이 그것이다. 그들 문명은 차례대로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대로 구분되며, 그것은 대체로 이집트의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에 해당된다. 즉, 크리트 문명은 시클라데스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출발점이자 중심이었던 것으로 에게 문명 전체는 크리트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전만해도 크리트 문명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와 크리트를 소재로 한 그리스 전설등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실상을 조사할 목적으로 1870년대에 슐리만이 소아시아 및 미케네 지방에서 크리트 문명의 유적을 탐사했고 1900년대 초반에 영국의 에반스경이 크리트섬에서 크노소스 미궁을 발굴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에세문명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고고학적 고증에 필수적인 그들의 문자, 즉 선상문자 β를 최근에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독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대부분 왕실의 재산목록과 행정상의 기록들로 종교, 철학, 예술, 풍속 등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적인 지식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트섬에서 크노소스 궁전이나 그 밖의 유적을 발굴함에 따라 궁전의 벽화와 함께 출토된 도기의 문양, 그리고 이집트와 소아시아, 미케네 지방에서 발견된 크리트에서의 수출품을 통해 복식문화의 실상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이라 하겠다.
크리트는 기원전 3400년경부터 문명의 발자취가 엿보이는데, 기원전 3000년경 초에 새로운 주민들이 크리트로 침입해 들어와 그들의 항해술을 고대 크리트인에게 전해 주었다. 더욱이 지리적 위치상 크리트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서 쉽사리 항해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외국과의 교역이 시작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이후 크리트인이 에게해의 중심적 국민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기원전 2800년쯤에 구리와 청동제법이 전래되면서 그들은 점차 독자적인 성격을 띠며 발전했다. 그 후에 발달한 크리트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하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세 시대로 나누고 있다.
◈ 초기 미노아 시대 : B·C· 2800~2300년
◈ 중기 미노아 시대 : B·C· 2300~1600년
◈ 후기 미노아 시대 : B·C· 1600~1300년
이 중에서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중기 미노아 시대 말에서 후기 미노아시대 중엽으로 추측된다.
크리트섬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길고 맑은 날씨로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해풍 덕택으로 덥지도 않고 겨울에도 온화하다. 이처럼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로 인해 실외생활을 즐겼으며 신체를 많이 노출시켰다. 신체의 노출은 이지트와 같으나, 이집트의 경우 뜨겁고 건조한 기후로 몸에 밀착되지 않는 드레이퍼리형의 의상이 환영받았으나 크리트에서는 기후로 인한 제약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몸에 꼭 맞는 의상이 발달한 점이 양자의 복식형태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크리트섬의 토지는 대부분이 거의 비탈지거나 메말라 경작에 알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뭄을 타지 않는 과일인 포도, 올리브나 아열대 과일을 재배했다. 경제의 빈곤을 보충하는 한 수단으로 청동기 제품 생산의 수공기술이 일찍부터 거대한 규모로 발달했고 이것은 소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동지중해 전역에 공급되었다. 이때 발굴된 보석과 장신구들은 크리트 복식문화의 첫 실례로서 순수한 심미안은 보여준다. 이렇듯 크리트의 부와 예술은 빠른 성장을 이루어 이집트나 바빌론의 수준을 따랐다.
그러나 기원전 약 2200년경 아리아인의 이주로 인해 그리스 본토가 아케아인에 의해 침입을 받았는데, 이것은 크리트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상업의 파탄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번영의 첫 쇠퇴기가 기원전 1880년까지 거의 4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나 다시 회복하여 기원전 1400년경까지 약 4세기 동안 번영의 절정을 누렸다. 이 시기는 크리트 복식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료가 이때 출토된 것이기 때문이다.
크노소스 궁전의 건립은 이 시기에 있어 대표적인 건축사업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내실, 창고, 작업장, 거실, 회의실 및 정청 등의 수많은 방이 복잡하게 배치된 미궁으로서 미노스 건축에 관한 중요한 정보원이 되었다. 그 건물의 전모를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나 페르시아, 아시리아의 사원이나 궁전에 비하면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기에는 통일된 기념비적인 효과를 추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개개의 구성단위는 대체로 작고 천장은 낮아서 몇 층의 높이로 된 건축물의 부분조차도 그다지 높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원주나 계단, 환기통 등이 그 궁전에다 쾌적할 만큼 개방적이고 신선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원주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고 꼭대기에는 넓은 방석 모양의 주두가 달린 특징적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회화와 조각, 도기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크리트의 대표적인 약동적인 모습의 표현양식인 듯하다. 크리트 복식에서 위는 부풀고 하체(여자는 허리까지)로 내려올수록 가늘어지는 모습이나 스커트의 종 모양, 끝이 잘린 원추형의 모자들은 이러한 감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모습은 크리트인들의 성격과 같이 가벼운 동적 느낌을 준다.
크노소스 궁전의 벽면에는 아름다운 색채, 흐르는 듯한 선, 사실적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는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거기에는 남자도 있지만 특히 많은 궁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후에 '파리의 여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인물 외에도 자연주의적인 정경, 즉 무성한 식물사이의 동물이나 새, 바다의 생물 등을 소재로 한 벽화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소재에 대한 예리한 관찰은 이집트 미술과 같으나 분위기나 미적 감각은 매우 다르다. 즉 이집트의 영구성과 부동성 대신에 율동적이고 파도치는 듯한 운동에의 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고, 형태 자체는 기묘하게 날렵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흐르는 듯한, 조금도 힘들지 않은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을 사실의 정확성이나 완전함보다도 더 중요시했음을 뜻한다.
크노소스궁 벽화에 표현된 부유하는 세계는 매우 풍부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은 당시 미술품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채색도기나 직물에 사용되었던 추상적 무늬는 점차 식물이나 동물을 소재로 한 새로운 내용의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미적 감각을 주위의 생활미술뿐 아니라 자신들의 치장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크리트의 특징적인 조상인 뱀을 든 여신상에서 뱀의 구부러진 모습이나 가슴을 노출시키면서 흘러 내려가는 상의의 곡선, 독특한 물결 같은 모양의 머리 모양은 모두 이러한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미술이나 복식에서 느껴지는 생명감 있고 약동적인 표현과 선명한 색채감각은 그만큼 이들의 생활습관이 개방적이고 활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복식에 나타난 새롭고 다채로운 색상이나 커다란 무늬들은 다른 고대복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크리트 사회에서는 이집트에서와 같은 엄격한 계급제도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들의 복장에서는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거대함이나 호화찬란함 등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들 특유의 관능적인 미의식을 나타내어, 오히려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크리트의 종교나 풍속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다산과 풍요를 숭상했던 것 같다. 이것은 여신상으로 짐작되는 작은 성상이 가슴을 온통 드러내고 몸 전체에 뱀을 감고 있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대의 많은 종교에서는 이같이 성상의 노출된 가슴이 여성의 풍요(다산)를 의미하고 있고 뱀은 남성의 풍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조형원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즉, 가슴을 풍만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허리를 졸라매어야 하고, 그 밑의 스커트의 퍼짐은 가슴의 강조를 위한 간접적 효과로서 당연한 것이다. 또한 스커트의 폭을 넓히기 위해 티어드 스커트가 디자인되었을 것이다.
다산의 강조는 크리트 사회의 특수성, 즉 모계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민권이 있는 여자는 남자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더욱 강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남자들이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금속벨트를 하는 등 여자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이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크리트에서는 일찍이 직물생산이 상당히 발달했다. 울을 직조 하여 사용했고 유럽에서 뒤늦게 이용하기 시작한 리넨을 당시 이미 생산하고 있었는데, 많은 방적기가 출토되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방적과 방직은 가내적으로 행해졌으며 여왕의 방 입구에 실패가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크노소스궁은 방적과 방직 생산을 위한 노동성을 찬양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동물의 가죽이나 털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직물염색이나 수장식으로 복식이 한층 더 화려해졌다. 크리트인들은 식물로부터 나오는 천연염료를 주로 사용했으며 조개로부터 분비물을 추출해서 햇볕에 쪼임으로써 붉은 보라색으로 변하는 염색술을 습득했다. 붉은 보라색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귀한 사람의 색으로 여겨졌는데, 이것은 서양복식사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이 밖에 보라색이 감도는 황색과 옥색 등도 발견되어 그들의 색채감각이 강렬하고 원색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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