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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의 복식 ①

by 해피버튼 2023. 2. 22.

1. 사회·문화적 배경

 

이집트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복식문화가 주로 지중해 연안 지역의 온난건조한 기후를 무대로 발달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마의 멸망 이후 서양복식은 유럽대륙의 내륙지방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중세복식은 북부 내륙지방의 복식과 비잔틴의 지중해성 남방지역 복식의 유입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며 발달했다. 이들이 분리된 시기인 5~14세기를 복식사에서는 통틀어 중세라 보고, 이 중 통일국가의 시원형이 등장할 때까지 즉, 게르만족의 분란이 계속되었던 10세기까지를 중세 초기라 한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용병이나 노예로 일찍부터 로마 영내에 들어와 있던 무리도 있었고,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지방에 정착한 일파도 있었으나, 그 외의 유럽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게르만족은 로마 문화권으로 남하하려고 했다. 몇 세기 동안에 걸쳐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유럽 국경에 침입했으나 대게 라인강과 도나우강 선에서 제지되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유라시아 유목민인 훈족에 의해 밀려 내려오면서 이 저지선을 돌파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 역사적 이동이 시작되는데 그 대략적인 경로는 다음과 같다.

 

◈ 발트해 연안에서 흑해, 로마를 거쳐 스페인을 점령한 서고트족

◈ 유라시아의 유목민으로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훈족

◈ 서고트족과 서로마를 몰락시킨 동고트족

◈ 라인강을 횡단하고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

◈ 발트해 연안에서 지금의 프랑스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부르군드와 롬바르드족

 

이처럼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종족의 종류와 그 경로가 매우 복잡했다. 그러나 점차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제외한 내륙지방을 차지한 프랑크족에 의해 통일되어 중세 서유럽의 가장 중심적인 국가를 이루었다. 프랑크 왕국을 건설한 메로빙 왕조의 클로비스왕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로마의 정통적 신앙과 결합될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분열되었던 왕국은 카롤링 왕조를 창시한 피핀과 그의 아들 찰스대제에 의해 그 기반이 확고해져, 서로마 제국의 구영토를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토를 확장해 가는 동안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기독교가 초기의 분산된 조직력에서 유럽세계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권위와 힘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대제의 로마제국은 그의 사호 그의 아들들에 의해 삼분되어 중세는 또다시 분열 속으로 빠지게 된다.

내륙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 진통을 겪으며 발전하는 동안 북부 브리튼에서는 앵글로색슨에 이어 노르만족의 침입이 잦아지더니 마침내 11세기 후반 노르망디공 윌리엄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혼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세 초기는 이처럼 혼란과 통일, 다시 분열이라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진행된 시대이므로 사회제도나 문화가 제대로 발달할 수 없었다. 서로마의 몰락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분열적이라고 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고 문화적으로도 거의 파국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 암흑시대의 어둠은 미술, 문학, 철학의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나 완전한 문화적 정체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역할과 비잔틴 문명 때문이었다. 교회는 미개한 이교도의 포교 및 계몽에 힘써 문학이나 예술활동은이들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650년부터 750년까지의 1세기 동안에 유럽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세의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실상 10세기 후반까지는 위대한 중세예술의 대부분의 터전이 뚜렷이 닦아졌다. 메로빙 시대가 카롤링 시대로 되고 다시 카롤링 시대가 중세의 중기 시대로 되면서부터 서방은 일부 상실되었던 예술적 기교를 차차 되찾아 로마네스크라는 자신의 양식을 이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7세기까지 수도원이나 궁정의 건축은 로마의 화려한 양식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보인다. 복잡한 수식이 거의 없는 평범한 건축물은 그대로 주민들의 의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가 중세예술의 부흥을 목표로 학예정책을 실시하자 이의 영향은 단순하던 건축물에 비잔틴풍의 화려함이 더해지는 식의 구체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를 계기로 회화나 공예, 직조, 자수 등 일체의 미적 감각이 요구되는 분야는 스스로 발전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복구를 도와준 것이 경제적 안정이다. 게르만인의 사회는 미개한 상태에서 직접 지방분권적 봉건제도로 이행하여 봉건국가를 조직했다. 여기에서 파생된 경제체제가 장원이다. 장원이란 자급자족적인 농촌경제로서 도로나 해양술이 발달하여 모든 종류의 문물이 수입되었던 로마와는 달리 지방과 지방 사이의 교역이 막혔으므로 자체 내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생산할 수 밖에 없었다. 중세 초기의 직조기술이나 금세공기술 등이 다른 예술적 분야에 비해 비교적 발달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중세 초기 복식의 성격은 성질이 서로 다른 여러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났다. 로마화 이전의 게르만 특유의 요소, 로마로부터 존속해 온 요소, 이슬람적 요소, 노르만적 요소, 아시아 유목민의 복식인 훈족의 호복의 요소와, 여기에 9~10세기에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받아들인 비잔틴의 요소들이 더해졌다. 이러한 중세적인 요소들은 게르만의 여러 종족들이 나타났던 시대적 순서와 이동경로, 정착한 곳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독자적으로 혹은 복합되어 게르만 복식문화에 반영되었다. 즉, 정착한 지리조건이나 인접 문화권의 영향에 따라 복식의 형태나 소재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초기에는 서로마의 영향이 잔존하다가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간 후기로 갈수록 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복식이 화려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지리적 조건이 다양하고 일찍 정치적 통일을 이룬 국가들은 복식이 선진적인 영향을 보이는 등 사회적 발전의 정도에 따라 복식문화의 진전경로가 점이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2. 복식의 개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게르만인의 침입을 받은 서유럽인의 복식은 게르만적 요소가 바탕이 되고 거기에 로마적 요소와 비잔틴 요소가 융합되어 고대복과는 다른 양식으로 발전했다. 즉, 둘러 입는 드레이퍼리 형태가 아니라 활동하기 편한 바지 형태의 의복을 채택하여 튜닉 밑에 입었으며, 여자들은 튜닉을 겹쳐 입고 망토를 썼다.

지역과 종족에 따라 매우 다양한 복식형태를 갖고 있으나 단순한 형이 일반적이며 조잡한 직물과 수수한 색이 주를 이루어 복식의 발달이 비교적 늦어 단순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귀족은 화려한 직물에다 자수, 보석 등의 장식을 했다. 동유럽에서 비잔틴 복식이 중심이 되고 있을 때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복식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의 복식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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