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문화적 배경
서유럽과 브리튼에서는 10세기 후기에 이르자 오랜 기간의 혼란기를 벗어나 통일과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955년 오토 1세가 독일을 통합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했고,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크를,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브리튼을 통일하여, 현재의 독일, 프랑스, 영국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통일 국가들이 국가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왕, 귀족 시민 등 사회계층 간에 활발한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었으며, 봉건제후들에 의한 장원경제 체제가 순조롭게 발전해 갔다. 그러나 그 구조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 폐쇄적 농업경제였다. 생산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여가를 이용한 수공업 등이 발달하여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에서 공업이 분리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직물공업이 기본적인 체제를 굳혀 가기 시작했다.
또 경제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기 시작했다. 농민은 종래의 농노라는 예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토지를 소유하거나, 지대를 지불하는 차지농이 되거나, 임금을 받고 일하는 농업노동자가 되는 등 좀더 자유로운 신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빈곤한 생활 속에서 벗어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고 시간적 여유도 생겨 주위와 자신을 치장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반 복식에서도 미적 감각을 중시한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교회는 정신적 안식처였을 뿐 아니라 기술학교로서 직조술, 자수, 금속세공술 등을 가르쳤는데, 이후 현대 복식에서도 애용되고 있는 프랑스 자수 기법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통한 직조술이나 자수의 보급은 이 시대의 의상과 장신구의 미화에 큰 역할을 했다.
동방으로부터 풍부한 염료가 수입되고 생산기술이 개선됨에 따라 양질의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모직물 공업은 초기단계에 불과했으나 이후 유럽의 복식을 발달시킨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이처럼 직물공업이 기반을 닦게 되자 복식은 이제 종래의 귀족, 성직자 위주의 기호에서 벗어나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문화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의 교세 확장을 주목적으로 여기에 인구팽창이라는 사회적 문제의 해결과 영주들의 세력과시 등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11세기부터 13세기말에 걸쳐 행해진 종교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 물질적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십자군 전쟁 초기인 11세기에는 한 시대의 문화사조를 대변하는 예술양식이 성립되었다. 즉,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 로마 양식을 바탕으로 한 비잔틴 양식이 전래되어 교회와 수도원 중심으로 새로운 양식의 예술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로마네스크 예술이다.
서유럽 미술이 동방미술의 이상과 보다 밀접하게 접근했던 때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번창했던 11~12세기 외에는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전 국가체제가 확립되지 못한 때인 9세기말 샤를마뉴가 고대예술의 진흥을 목적으로 학예정책을 실시했으나 서유럽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곧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점차 독특한 문화적 성취가 실현될 수 있었다. 중세 문화의 발전에 있어 기독교의 힘은 절대적인 것으로 중세 서유럽의 기독교의 발전은 지방차가 현저하긴 했지만 신앙의 보편화로 인해 미술에서는 공통적인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학식이 풍부하고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권력의 지위에 올라 군주의 궁정에 영향을 미치고 예술의 부활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
여기에 비잔틴 예술이 전래되면서 그 노력은 더욱 빛을 보게 된다. 봉건영주들의 경제적 지원과 수도원의 기예승의 기술이 결합되어 그들의 야망이었던 거대한 석조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성당 건축의 양식을 가리켜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불렀으나, 오늘날은 11세기, 12세기 미술 전체의 양식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일컫게 되었다.
로마네스크는 그 건축양식이 로마 건축의 주제인 반원, 아치, 원주를 응용했기 때문에 로만이란 명칭을 붙인 듯하다. 그렇다고 로마의 건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었고, 고딕을 향한 과도기적 양식으로 민족과 풍토에 따라 여러 가지 지방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의 조형성은 성당뿐 아니라 조각, 벽화, 그리고 공예품 등에도 지배적인 양식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으로는 십자형의 건물 배열에 아치의 조직적인 구성, 두터운 벽과 아치의 압력을 견디기 위한 작은 창문 등을 들 수 있다. 창의 면적이 적어 넓은 벽면을 부조와 벽화로 자유로이 꾸밀 수 있었는데 이제까지의 건축장식에는 인물표현이 적었음에 반해 이들은 대부분 사람을 소재로 한 것이어서 당시 복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전체적인 외관이 주는 중후하고 순박한 양감은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심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로마네스크 성당 모습은 비잔틴의 사원이나 후기의 고딕 건축과 비교해 볼 때, 비잔틴 양식이 많이 도입되기는 했으나 북구풍의 게르만적 요소가 여전히 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십자군 전쟁이 가져온 자극으로 동방의 아름다운 견직물과 면직물이 진보된 직조기술과 함께 수입되었다. 이들은 모슬린, 디마스크, 새틴, 벨벳 등 풍부한 광택과 부드러운 질감, 화려한 색채와 무늬를 가진 소재로 단순한 모직물이나 견직물만 사용하고 있던 서유럽 사람들, 특히 귀족들에게 놀랄만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주로 비잔틴 제국과 인접하여 상품시장으로서의 도시가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의 제네바, 피렌체, 피사 등을 통해 수입되었고, 다시 프랑스에 운반되어 상파이유의 대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들 상품에는 호화로운 특수계급의 사치품과 모직, 염료, 명반 그리고 금속류와 같은 수공업의 원료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복식에 직접 영향을 주어 복식의 양과 질을 향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복식의 발달도 좁은 범위의 자연적 환경보다 도시의 발달에 따라 문물의 교류를 담당한 상공업자나 기술자의 능력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다. 피렌체의 유명한 모직 제품을 예로 들면 우수한 원료는 영국에서 수입하고 염료는 동방에서 자유로이 운반해 오는 등 문물의 교류에 힘입었으며, 직조는 우수한 기술의 수공업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여기에서 중세복식에 나타나는 혼합성이 다시 한번 설명될 수 있다. 의상과 장식품의 재료는 이처럼 교류품의 중요한 품목을 이루면서 도시의 발달에도 기여했는데, 12세기에 들어오면서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도 도시가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점차 번영하게 되었다.
또한 기계의 발명은 상공업을 향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의 기계는 수력기로서 생산의 능률화게 기여했고 방추나 직기도 일층 개량되어 기술은 점점 향상되어 갔다. 수공업 중 가장 발달한 것이 직물산업이고 분업도 다른 분야보다 빨리 진전되어 12세기 중엽에는 중세의 특수한 조합인 길드의 기틀이 이미 성립되었다. 분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의복이나 장신구의 제작에 있어 좀 더 기교적인 진전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원래 기독교는 신체의 노출을 싫어했기 때문에 의복으로 몸을 감싸고 외관의 존엄성에 그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로마네스크 시대 의복의 경향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본격적인 제작기술의 진전으로 자연적인 체형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하는 경향 즉, 몸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방향을 나가게 되었다.
한편 십자군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군복이 점차 일반인에게 유행되기 시작했으며 추위를 막거나 적군의 무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심을 넣은 조끼가 남자복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로마네스크 장식의 모티프는 공상화된 동식물, 인간 등이 문양화 되고 이것이 다종다양하게 조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모티프는 인간과 동물이 자연의 형태를 잃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대부분 기하학적 모양의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아름다운 리듬을 살리도록 표현되었다. 이러한 로마네스크 장식의 특징은 직물과 공예품으로써의 장식품 그리고 의복의 트리밍 등에 자연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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