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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의 복식 ①

by 해피버튼 2023. 2. 20.

1. 사회·문화적 배경

 

에트루리아인은 로마에 살던 원주민으로 그들의 복식은 로마 복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에트루리아의 복식은 동방과 그리스양식의 혼합형일 뿐 아니라,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진행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자를 해독할 수 없고 유적, 유품도 다른 문화권에 비해 적어 에트루리아 복식문화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8세기경, 소아시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의 경우와 같이 본국인 동방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문물을 가지고 들어왔고, 또한 그리스와 접촉합으로써 문화가 더욱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기원전 7·6세기경 코르시카를 정복하고 로마를 그 지배하에 두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들의 도시 발달은 그리스의 도시와 맞먹었고, 그들의 함대는 서지중해를 제압하여 광대한 상업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처럼 통일국가를 건설하지 않고 개개의 도시국가로 구성된 엉성한 연합체를 만드는 데 불과했다. 그들의 문화가 같은 시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원시성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인에게 차례로 패배당하고, 기원전 1세기에 로마에 의해 점령된 짧은 역사를 지녔다.

에트루리아는 해상무역과 농업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는데, 특히 3면이 바다라는 조건으로 인해, 지중해를 둘러싼 인접국들인 그리스, 이집트, 페니키아, 미케네 등과의 문화적인 교루가 왕성했다. 특히 그리스로부터는 화려한 보석과 의복, 그 밖의 일상용품들이 대규모로 수입되어 그리스 문화가 이곳에서도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문화의 수입은 에트루리아 복식의 성격을 다양한 것으로 특징지었다.

에트루리아 문명의 개화는 그리스의 알카익 시대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 에트루리아 미술이 최고로 활력을 딘 것은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리스의 영향이 절대적이긴 했으나 에트루리아의 미술가들이 그리스의 작품들을 단순히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명확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의 독자성은 우선 그 종교적 관념에서 분명해진다. 그들은 분묘를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안주하는 곳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분묘에서 발굴된 사자상이 침상과 같은 모양의 석관의 뚜껑 위에 기대어 누워 있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띠고 있는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이집트와는 달리 평상시의 복식을 그대로 입고 있어 복식연구에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형태의 엄격한 규범은 전혀 없고 솔직함과 쾌활함이 나타나 있다.

분묘 내부의 화려한 벼과도 이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 중 춤추는 한 쌍의 남녀를 그린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격정적인 운동감은 현저히 에트루리아적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여자의 복식으로 풍성한 스커트는 투명한 옷감으로 만들어져 인체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리스, 크리트와 다르고 서아시아와는 더더욱 다르며 오히려 멀리 이집트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투명한 옷감은 그들의 직조방법이 매우 발달된 단계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들은 모두 에트루리아의 국민성과 그에 따른 복식의 전체적 감각을 예견하게 한다. 즉, 착하고 명랑하며 낙천적인 생활태도로 생활 자체를 즐겼던 듯하다. 그들은 또 나체로 다니기를 좋아했고, 의복에서도 장중한 위엄이나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보다는 활동적이고 경쾌한 리듬감을 주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크리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것은 해양문화의 공통점이다.

에트루리아도 모권사회로 여성의 지위가 동방의 여러 나라와는 달리 비교적 높아 남자와 거의 동등한 자유를 누렸으리라 생각된다. 함께 춤추거나 운동을 즐기는 장면 등의 벽화가 발견되고, 무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의 대부분에 여자소유주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가족무덤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여자였던 사실 등이 이러한 추축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여자복식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저숙가들에 의하면, 에트루리아인들은 건축공학과 도시계획 및 측량술의 대가들이었다. 기능적인 도로나 요새화된 성문, 거대한 사원이나 무덤 등은 그들의 문화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발달된 건축술은 로마로 전수되어 로마 건축을 발달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에트루리아의 조각품과 장신구는 그들의 금속세공기법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더욱이 에트루리아의 안정된 경제상태는 초기부터 동, 은의 개발을 발판으로 하고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고대 지중해 연안에서 그들의 세공술은 널리 인정받았을 것이다. 이 외에 구두제조, 재봉방법 등도 꽤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에트루리아의 유물 가운데는 직사각형, 반원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직물이 있어, 그들 복식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들은 그리스의 직사각형 히마티온에서 로마의 반원형 토가로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복식의 개요

 

에트루리아의 복식에 관한 자료는 그들의 분묘의 벽화와 조각, 부조, 도자기 등에서 얻을 수 있다. 에트루리아의 복식은 이집트, 소아시아 등 고대 오리엔트와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크리트 등 여러 나라들의 복식을 혼합한 것이다. 즉, 크리트의 영향을 받은 스커트와 짧고 좁은 소매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이부식 의복형과 그리스의 키톤과 히마티온식의 드레이퍼리형 의복이 공존했고, 거기에 이집트에서 유래한 듯한 수직방향의 주름이나 소아시아 지방의 화려한 색상의 트리밍등도 나타나, 고대복식의 특징적인 요소들이 에트루리아의 복식에 종합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더욱이 에트루리아의 복식은 로마에 그대로 이전되어 이들 여러 복식요소들과 로마 복식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 역할을 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보겠다.

맨 몸에 얇은 맨틀만을 걸치거나 나체로 운동경기를 하는 등, 이들에게는 해양에 인접한 국가의 공통적 성격인 나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녀가 간단한 튜닉을 입고 그 위에 테베나를 걸치는 형식이 보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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