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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복식 ①

by 해피버튼 2023. 2. 18.

1. 사회·문화적 배경

 

인류 최초의 문명은 오늘날 중동지방의 두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나일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 인간들이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갈 즈음, 그들이 찾아낸 비옥한 토양이 이들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크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삼각형 모양의 지대로 메소는 사이 또는 중간을, 포탐은 강 또는 하천을 의미하여 '강 사이의 땅'을 뜻한다. 두 강은 매년 범람하여 토양을 비옥하게 했으나 그 시기와 규모가 나일강의 범람과는 달리 일정하지 않아, 농사짓기에 적절한 수로와 저수지 시설을 개발하여 기후에 잘 적응하던 수메르인이 토착하면서부터 이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문명이 싹텄으며, 수메르인들은 그 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게 될 여러 문명들의 기반이 되는 문화적 배경을 만들어 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는 개방적인 환경조건 때문에 끊임없는 이주와 침입의 연속이었는데 새로 이주해 온 민족들은 수메르 문명이 핵심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새로운 문명을 결합하여 보다 발전된 국가를 이루었다.

B·C· 16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 문명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일련의 침입이 있었으며 그 결과 B·C· 1200년 이후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히브루, 페니키아, 아시리아등의 주요 문명들이 새로 일어나게 되었다. 또 B·C· 6세기 이후에는 페르시아가 중동지역 전역을 정복하여 고대동방의 최대기후의 통일국가를 형성했으나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유럽의 역사적 중심은 고대 동방에서 서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B·C· 3500년 경까지 수메르에서는 10여 개 이상의 독립된 도시국가들이 성립되어 각각 자체의 도시 수호신을 숭배하고 왕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중 우르는 최대인구를 갖고 있던 도시국가로 그 사회는 귀족과 성직자, 평민, 노예의 3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거대한 벽돌탑인 지규레를 쌓아 그 정상에 신전을 두고 도시 수호신을 숭배했다. 수메르인들은 대개 농사나 역사적 사건들을 매우 정교하게 양각했는데 특히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의 위대함을 경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입상이 많다. 이들은 또한 쐐기모양의 표식으로 글자를 나타낸 설형문자를 만들고 갈대줄기를 펜으로 하여 이 설형문자를 점토판에 적고 구워냈는데 후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간단하게 한 것이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바빌로니아는 B·C· 1894년경 셈족이 기존의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을 정복하고, 이후 정치적 중심지가 된 도시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함무라비왕 때 전성기를 누린 국가로 이들 셈족의 아모리인들은 기존의 수메르인들의 문화와 종교, 법제들을 기본으로 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농업 외에 다른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인도,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와 교역했으므로 바빌로니아는 국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계약에 의한 교역, 무역의 발달 등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법제가 일찍 발달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법이 이때 체계화되었다.

 

아시리아는 B·C· 911년에서 B·C· 612년경에 걸쳐 부흥하게 된 도시국가로 전성기에는 그 영토가 광대해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합한 최초의 제국이 되었으며, 아시리아인들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호전적 기질의 국민들로 이들의 정복자적 기질은 결과적으로 군복의 발달, 동방복식 요소의 도입 등 복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시리아는 B·C· 612년에 패망하게 되었는데 그 큰 이유는 정복일변도의 확대정책으로 내실을 기하지 못했고 잔혹한 정책으로 정복지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문명권은 이와 같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동남부를 중심으로 성장·소멸한 문명들과 함께, 넓게는 소아시아 쪽에 기울어진 지역에서 흥망 한 국가들을 일컫는데, 즉 일신교의 발달을 통해 크리스트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헤브라이 민족, 해상활동과 무역으로 큰 세력을 이룬 페니키아, 고대동방의 최후 통일 제국을 형성한 페르시아, 그리스 고전문명의 선구가 된 에게 문명 등이 그것으로 그들 또한 고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페르시아인은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며 B·C· 6세기경 페르시아만 동부의 고원 산악지대에 흩어져 기마생활과 사냥을 주로 하면서 메디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민족으로 B·C· 550년경 키루스의 영도하에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를 세웠는데 이곳이 지금의 이란이다.

 

페르시아는 이후 리디아와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광대한 고대 동방의 여러 원주민들과 유목민을 통합하여 5세기말 다리우스 1세 때에 동방 최대의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문화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인도와 에게해에 이르는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여 발전시킨 절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의 성격은 복식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에서 복식의 계급상징의 역할과, 전리품 등으로 얻어진 부의 축적을 통한 상류층의 장식욕구 등은 독특한 페르시아 복식형태를 구성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2. 복식의 개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개방적이어서 끊임없이 서로 정복하고 지배했다. 따라서 그 문화는 외부로부터 침공에 의한 타문화와의 접촉으로 인해 이질적인 요소가 혼합·융화된 절충적 성격을 갖는다. 이 지역의 복식문화의 성격 또한 도시국가들 간에 뚜렷한 변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몇몇의 공통점을 보여 주기도 한다.

수메르의 복식은 랩 어라운드 형태의 스커트와 숄이 대표적인 것으로 남녀가 모두 착용했는데 이것은 모피나 모직물로 만들어졌다. 또 카우나케스라 불리는 여러 층의 모피로 만들어진 스커트와 숄 또한 특징적인 복식형태이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기본복식은 술이 달린 튜닉과 숄이다. 술 장식은 장식과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발달된 자수와 염색기술로 호화롭게 모양을 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활발한 교역으로 모직물과 더불어 실크와 리넨 등의 화려한 직물을 의상에 사용했다. 특히 아시리아에서는 기능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군복이 발달했으며 이 두 시기의 여성 복식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의 복식형태를 따르면서도, 메디아의 국민복이었던 캔디스를 입거나 그들 특유의 복식을 착용했는데 튜닉과 더불어 기본복식으로 등장한 바지와, 턱시도 칼라에 쎗인 슬리브가 달린 코트 등은 복식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그들이 고도의 재단과 재봉법을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현재복장의 재단과 재봉의 기원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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