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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시대의 복식

by 해피버튼 2023. 3. 15.

18세기 초에 프랑스 루이 14세의 후광으로 여전히 이전 시대의 호화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세기의 문화를 대표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이전보다 ㄷ욱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각국은 프랑스 문화를 추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예술도 패션도 사고예절도 모두 프랑스식 일색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유럽에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절대왕제의 틀이 부드러워짐과 함께 귀족사회는 서서히 몰락해 가고 문화양식에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형식적이고 엄격한 규칙을 버리고 감성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던 이러한 감정이 새로운 예술 양식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정신의 구체적인 발현은 주위의 가장 가까운 복식과 실내 장식 등에 반영되었으며 이것들은 그들의 생활감정을 크게 만족시켰다.

전 시대까지 번성하던 바로크 복식은 왕실과 귀족계급의 기풍을 과시하는 듯 호화롭고 형식을 중히 여기며 내용의 공백을 치장으로 채우려는 천박한 시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장식을 과도하게 사용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런 압박에 싫증이 났을 때 인간 내면감정의 욕구가 눈을 뜨고 쾌락적인 생의 욕구가 모든 생활영역에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적이라는 것과 병행하여 생활은 자유로워지고 도덕은 퇴페적으로 흘렀다. 루이 14세 이후에 정부를 두는 그늘진 행위가 표면화되었고 자랑으로까지 여기게 되어 파리 상류사회에서 유행했다. 여자들은 국왕의 정부가 되는 것을 지상의 동경으로 알게 되어 요염한 화장과 호사스러운 의상으로 국왕과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와 같은 사회풍조에서 형성된 복식감각이 서유럽 모드를 크게 지배하게 되어 의상미의 개념은 이미 이전과 같이 권력표시를 위한 호화로움도 아니고 정연한 규칙도 아니었다. 대신 환상적이고 정겨움이 넘치는 모양이 지상미의 요소가 되어 남녀복식을 특징 지웠다. 이 경향은 18세기 중엽부터 특히 현저해지며 장식에까지 특유한 분위기와 매혹이 넘쳐흘렀다.

복식뿐만 아니라 18세기 미술은 17세기의 딱딱한 뼈대나 틀이 벗겨지고 모든 예술 양식에서 유동적이며 굵은 직선은 간드러지게 휘어져 섬세하기 그지 없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로코코 양식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로코코의 어원은 프랑스어로 로카유와 코키유인데 이는 정원의 장식으로 사용된 조개껍데기나 작은 돌의 곡선을 의미한다. 이 곡선의 감각은 잔잔히 흐르는 듯, 경쾌히 춤추는 듯한 선감각으로서 우아하고 여성적인 것이며 귀족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인공적이고 실내적인 특색을 지닌다. 즉, 리드미컬한 곡선이 주제를 이루며 밝고 화려하고 세련된 기족취미를 바탕으로 하였다. 

로코코의 예술양식은 먼저 프랑스의 살롱을 중심으로 하여 번져나가 각지에서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살롱은 16세기 중엽에 몇 개의 살롱 문호가 개방되고 나서부터 부유한 시민들의 쾌적한 사교장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남녀가 정치, 경제, 사회, 철학, 문학, 도덕, 풍속, 생활감정, 예술 등 여러 가지 화제를 중심으로 즐겁게 토론했다. 프랑스인들은 이전 시대인 바로크 왕실의 장려함과 권력의 압박, 에티켓의 거북스러움 등으로 인해 숨 막힘을 느꼈으므로 자연히 살롱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찾아 모이게 된 것이다. 형식적인 허세 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를 즐겼던 살롱 문화는 장식미술에 로코코 양식을 나타나게 했다. 즉 꽃, 리본 레이스, 루프, 꽃바구니 등의 유연한 모티브가 기묘하게 어우러져 모든 생활공간에 표현되었다. 

18세기 복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루이 15세의 애인인 마담 퐁파두르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이들은 18세기의 패션 리더로서 그들의 복식은 곧 프랑스 사교계에 유행이 되었고 이는 다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부르주아 출신으로 그녀의 부상은 부르주아 귀부인들의 동조를 가져왔고 최신 모드를 즐기는 부류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지성적이고 예술 전반에 걸쳐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어 의상뿐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장식에도 그녀의 취향이 작용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는데 극단이나 소극장의 건립뿐 아니라 당대의 화가인 부셰와 와토 등은 모두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ㅏ볍고 날아갈 것 같은 옷감을 즐겨 썼고 프릴이나 러플 등의 주름장식, 레이스, 리본, 꽃 등을 장식요소로 사용해 여성다움을 의상에 최대한으로 표현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허영과 사치의 표본으로 20년간 베르사유라는 개인무대 위에서 자기 도취에 빠져 로코코 양식의 여왕 역할을 화려하게 해냈다. 즉위 한지 석 달도 안되어 그녀는 벌써 의상계의 패션리더가 되어 의상과 머리형의 모델로 부상했고, 그녀의 스타일은 모든 살롱과 궁정에서 모방되었다. 그녀는 사상 최초의 황실 디자이너로서 로즈 배르댕을 두어 로코코의 복식문화를 더욱 화려하게 꾸미는 데 공헌했다.

그녀의 머리는 헤어드레서인 레옹아르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녀의 허영을 만족시켜 주는 각종의 기괴한 머리모양이 탄생되어 18세기 후엽의 머리 스타일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것이 특징이다.

로코코풍은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복식 전반을 지배하는데 18세기 중엽부터 약간 다른 경향을 보이게 된다. 고대식의 간소한 아름다움이 로코코 양식에 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굽이치는 곡선과 소용돌이 대신 품위 있는 직선을 좋아하게 되며 자유분방한 움직임에서 어떤 일정한 틀에 들어가려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극도의 쾌락에 지쳐 미와 지성이 숨 쉬는 고전풍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복식에 현저해진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다. 그때까지 수십 년 간은 쾌락적인 부드러운 양식과 간소한 고전풍이 부분적으로 혼합되어 나타났다. 혁명 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로 프랑스의 모드는 성핼할 장소를 바꾸어 한때 영국으로 그 무대가 옮겨졌다. 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의 결과 직물 생산기술의 발전도상에 놓여 있었으므로 세계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 복식의 양식은 그 민족성과 유력한 시민의 힘, 그리고 군복의 영향과 직물의 재료와 양식이 혼합되어 일반적으로 남자다운 견고함과 검소함이 우세를 보였다. 그래서 여자 복식에도 남자 옷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나며 특히 남자복은 이를 기회로 세계 패션의 지배력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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