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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복식 ①

by 해피버튼 2023. 2. 21.

1. 사회·문화적 배경

 

헬레니즘 문화권의 쇠퇴와 함께 그리스의 복식문화의 발달이 말로에 도달했을 때 이 문화가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발전도상에 있던 로마로 연결되어 강대한 고대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복식사에 있어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즉, 그리스의 드레이퍼리를 계승하여 완성하고 이를 후세에 전할 수 있었던 그 위업은 그리스 복식의 예술성과 동등한 가치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로마의 이러한 공로는 실제 후세 르네상스에서 프랑스혁명 후기에 이르는 근대 서양복식에 있어 기본이 되었던 고전양식을 생각할 때 더욱 중시되어야 한다. 

로마는 지중해의 중심인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했기 때문에 주위의 여러 민족과 쉽게 접촉할 수 있어 자연히 국제적인 문물의 교류가 일찍부터 행해졌다. 기후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이것은 로마 복식의 성격을 그리스와 같은 드레이퍼리성 복식으로 결정지어 준 요인이다.

로마인들의 종교는 현세적인 자연이나 그리스적 신화를 숭배 하는 것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영혼들에게 규칙적으로 봉납하면 보호와 은총을 받으리라는 믿음에서 신앙의식을 일상생활의 필수적이고 실질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로마인의 이러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종교관념은 그들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좋은 점을 모방하여 자신에게 맞는 문화로 재생시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성격을 띠게 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학문이 철학, 미학, 신학 등 형이상학적으로 발달한 그리스의 학문과는 대조적으로 법률, 수사, 역사, 토목, 건축 등 실용적인 학문으로 발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 복식에 나타나는 위엄, 박력, 양감이라는 특성은 인문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보다 독특한 사회제도에 의한 영향이 훨씬 크다. 로마에 있어 복식과 사회적 배경의 관계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도 밀접하여, 복식은 그 시대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역할을 했다.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 중기로부터 5세기 후기에 이르는 13세기 동안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는데 그 시기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왕정 : B.C. 750 ~ 509년

◈ 공화정 : B.C. 509 ~ 30년

◈ 제정 : B.C. 30 ~ A.D. 476년

 

건국의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 라틴 종족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여기에 다른 종족이 합해져 로마시민, 즉 포풀레스 로마누스가 형성되었다. 왕을 선출하는 등의 공공문제를 처리하는 원로원이 각 족장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파트리쿠스라는 귀족적 신분으로 동족인 포풀레스 로마누스와 구별되었다.

로마가 정복에 의해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본래의 시민과 새로이 로마국민으로 편입된 이민족은 평민으로 불리웠고, 토지 소유권이나 재산 분배권 등 공권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격한 대립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결과 시민, 평민이 다 같이 재산의 차에 의해 계급이 분리되는 새로운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 제도는 공화정권 수립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또한 로마문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완고한 기반을 가진 파트리쿠스와 점차 세력이 증강되어 가는 평민과의 계속적인 투쟁은 국력의 번영과 함께 활발히 전개되었다. 양자의 투쟁이 한창인 중에도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아프리카 북단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대규모의 정복이 행해지면서 로마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정복한 지중해를 통해 많은 속주에서 호화로운 직물, 장식품 등 진귀한 사치품들이 수입되었고 또한 그 주민을 이입시켜 이들을 노예로 사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토와 개화에의 욕망이 더욱 자극되었다. 이들 노예의 노동력으로 인해 로마의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으나 반면 지방에 따라 기계의 발달을 방해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즉, 당시 이미 수력이용이 발명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생활의 모든 면에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한 원시적인 방법이 지속되었다. 이 중에서 직물 생산은 특히 노예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직물을 수축시켜 내구성을 늘리기 위해 물속에서 손, 발, 방망이 등으로 다지는 일이나 백토를 이용해 발로 밟고 화산구에서 얻은 유황을 모아 그 증기로 하는 표백작업 등이 있는데 폼페이의 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노예제도는 그리스보다 로마에서 더욱 발달했으며 국가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B.C 2세기에서 A.D. 2세기에 걸쳐 성행했다. 따라서 귀족층의 세력도 증강했는데 사치품이나 가옥의 장식, 의상 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복식문화가 발달하게 된 반면 사회풍조는 사치와 방종으로 매우 문란해졌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는 제정의 수립을 초래했고 결국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원인이 되었따.

A.D. 2세기 경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고, 부와 노예의 노동력으로 귀족층의 생활은 사치하고 방탕했으며 복식이 극도로 화려하고 우아해졌다. 그러나 서민생활은 귀족과는 대조적으로 비참했으며, 이러한 빈부의 차는 반란을 초래하여 국력의 소멸을 가져오고, 마침내 394년 동, 서 로마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로마는 영토와 재산의 차별제도 아래에서 구축되었으며 문화도 역시 그러한 기반 위에서 발전되었다. 토지소유에의 야망, 특권계급에 대한 동경 등은 로마인들을 현실적이며 박력 있는 성격으로 만들었고 거대한 제국을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스스로 예술을 창조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모체를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에서 얻어 여기에다 현실성을 첨가함으로써 강대하고 박력있는 것으로 완성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러한 능력은 복식과 건축에서 최대로 발휘되었다.

그리스 건축의 기본 요소이던 원주는 로마 시대에 들어와 더욱 화려하게 발전하여 코린트 양식을 형성하게 된다. 코린트식 원주 외에도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둥근 아치를 독자적으로 발달시킨 형태를 로마의 유적인 다리, 목욕탕, 수도, 개선문, 원형 경기장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형의 천장에 사용된 아치는 실상 굴의 지붕같이 연결된 형태로 넓은 지면을 덮을 수 있었다. 이 밖에 둥근 지붕, 돔을 디자인했는데 이러한 반원형의 곡선감각은 로마 주민의 복식에 있어 새로운 감각으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드레이퍼리형이나 맨틀형 의복의 펴놓은 모습 가운데 반원이나 적어도 반원형을 이용한 형태가 많은 사실이 이를 설명해 준다. 이처럼 로마의 건축은 이전 시대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종합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사회는 처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외래문명에 대해 관대했다. 범로마적 기풍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한 모든 외래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미술은 그리스의 유산뿐만 아니라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에트루리아, 이집트 및 서아시아의 유산까지도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동질적이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그리고 매우 복잡한 개방적인 사회의 형성요인이 되었다. 로마 복식의 성격 또한 이와 같은 성격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에서는 이제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실제적인 용도를 가진 건축물을 많이 건립했는데, 이는 대제국을 관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현실적인 성격을 가진 로마문화는 그리스 문화가 폴리스 사회에서 이상미를 추구하면서 발달한 것과는 대조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그리스의 드레이퍼리는 민족의 생활감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본래의 미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음에 비해 로마의 복식은 사회적인 지위나 생활수준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사회적 의의를 가졌다. 따라서 지배계급에서 의복에 대한 동경과 야망 등을 자극하게 되었다.

대표적 민족복인 토가는 한 장의 천에 입는 방식과 색상의 변화가 주어짐으로써 황제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계급을 반영했다. 복식에 대한 사회적인 여러 규칙은 드레이퍼리 복식의 생명인 자유성과 이것에 수반되는 예술성 등을 엄격하고 획일적으로 규제하여 그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즉, 위엄과 권력이 주는 장엄한 미가 발휘되기는 했지만 그리스적인 이상미에서 느낄 스 있는 순수한 미는 볼 수 없다. 드레이퍼리의 본질이 이처럼 변질되어 가는 동안 경제적인 번영으로 점점 대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제정 말기에 와서 토가는 최고 권위자나 성직자의 의상으로 유지되었다.

 

로마의 사회상은 남성들의 복식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으나 사회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복식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리스의 여성이 미약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것에 비해 로마 여성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는 로마 사회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했고,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여성은 외출도 자유로이 하고 학교도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보다 나은 품위와 지성미를 겸비하는 것을 중시했다. 반면 로마 법률에 있어 부인은 전면적으로 남편의 감독하에 있었으므로 의복, 장신구의 착용 등 모든 것이 남편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남편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항상 우미와 품위를 잃지 않게 매혹적으로 꾸미는 것이 여성의 생명이었다. 로마에서도 그리스와 같이 공창제도가 있었는데 이들의 의복은 여석복식의 발달에 있어 큰 자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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